'서울의 봄'의 흥행 성과는 평범하지 않습니다. 개봉 첫날, 하루 동안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의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단 5일 만에 20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모았습니다. 이는 작품의 배경인 1212 사태와 그 사건에 연루된 실제 인물들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였습니다. 전두광 캐릭터는 외모를 통해 전두환임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른 캐릭터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정우성 님이 연기하신 이태신 캐릭터가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영화에서의 이태신 캐릭터는 실제 장태완 소장을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그는 군사반란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1월 19일에 제7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쿠데타에 맞서 싸운 군인 중 한 분이었습니다. 그의 후일사를 살펴보면, 한국증권전산과 르메이에르의 회장을 역임하였고,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그는 2010년 7월 26일에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시면서 그의 삶은 매우 다채로웠습니다.
1212 사태란?
이 작품에서 다루는 1212 사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이 사건은 '군사반란'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에 일어난 이 사건은 대한민국 육군의 불법적인 조직인 하나회의 일원이었던 전두환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제5공화국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과거에는 '사태'나 '사건'으로 불리다가 김영삼 정부 시절에 반정부 군사 쿠데타로 재정의되면서 '군사반란'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군사반란이 발생한 원인은 2달 전에 일어난 1026 사건에 있습니다. 이 사건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등 총 6명을 총으로 살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국가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계엄사령부에서 수사 총책을 맡게 된 전두환의 권력이 점차 강해지게 됩니다. 그를 견제하려던 다른 세력들이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키려 하자, 전두환이 먼저 반격에 나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 중 하나인 1212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장태완 전 사령관 생전 증언
장태완 전 사령관의 생전 인터뷰가 공개되어 많은 이들의 감정을 자극했습니다.
1995년에 방송된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에서 장 전 사령관이 출연한 영상이 MBC의 유튜브 채널에 6일에 공개되었습니다. 이 영상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아 단 하루 만에 170만 회에 이르는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방송에서 장 전 사령관은 "우리 국민들이 12·12와 같은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쿠데타의 실상을 인지하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화에서 이태신 장군이 쿠데타를 주도한 전두광(황정민) 보안사령관에게 맞서는 장면처럼, 실제로 장 전 사령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이 일으킨 군사반란을 막기 위해 최후까지 저항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반란은 성공하고, 장 전 사령관은 신군부에 체포되어 육군 소장에서 이등병으로 강제로 예편되는 등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장 전 사령관은 "12·12는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장군이 주도한 반란이었기 때문에 완벽하게 보안이 이루어졌다. 나를 비롯해 계엄사령관, 국방장관, 대통령님도 모두 모르셨다"며 "그날 저녁에 연희동으로 식사에 초대받아 도착했던 시간이 오후 6시 반이었는데, 그때쯤이면 이미 95% 이상 반란이 성공할 것으로 보장되었을 것"이라고 회고하셨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실제로 내가 요청했던 병력 중 한 명이라도 동원되었을까. 그들 모두가 이미 (쿠데타) 판을 짰다"라고 말씀하시며, "사령부에 가보니 반란을 진압해야 할 주력 부대인 30 경비단장, 33 경비단장, 헌병단장 세 단장들이 전부 경복궁 30 경비단의 반란에 가담하고 있더라. 그들은 이미 10·26 이후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충분히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라고 밝혔습니다.
장 전 사령관은 가장 원망스러운 것이 있다면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나 자신이 너무 부족해서 제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내가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요청했던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에 대한 승인이 즉시 내려지지 않았던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장 전 사령관은 "(요청한 병력이 동원되었다면) 경복궁에 있던 반란군 4개 여단은 한 번에 제거할 수 있었다"며,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국가의 최종적인 반란 진압 책임은 헌법상 대통령에게 있다. 대통령은 내란과 반란으로부터 국가의 헌정질서를 지켜야 한다. 장관의 보고가 없더라도 즉시 진압 명령을 내려야 했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12·12 이후로 장 전 사령관 개인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장 전 사령관이 체포된 소식에 분노한 그의 부친은 곡기를 끊고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그의 아들은 같은 해에 실종되었다가 낙동강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장 전 사령관은 "아들이 2학년으로 진학하는 겨울방학 때 '도서관에 간다'라고 하고 나간 후 한 달 동안 소식이 없었다가 결국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발견 장소인 낙동강변 야산에 가보니 아들의 시신은 완전히 얼어서 거적으로 덮여 있었다"며, "아들을 안고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아내에게 보이기 싫어 제가 입김으로 녹이고 혀로 씻어냈다. 그때 눈에서 사탕만 한 얼음덩어리가 나왔는데, 아마 이것이 세상을 원망하며 가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제 가슴에 수많은 못이 되어 있다"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장 전 사령관의 부인은 생전 인터뷰에서 "우리 가족이 왜 이렇게 비참해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 국가를 배반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음모를 꾸민 것도 아니잖아"라며, "(한 번은 남편에게) 농담으로 '당신이 왜 그쪽에서 유인하지 않았느냐. 그쪽에 있었다면 성공하고 풍족하게 가족을 잘 챙겼을 텐데'라고 말했다"라고 전했습니다.
장 전 사령관은 "나중에 저가 그들(신군부)을 반란죄로 고발했더니 오히려 개인이나 집단으로부터 7번의 고소를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저가 그들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하극상 고소를 당했던 것도 있었고, 병력 동원을 요청했다는 이유로 반란죄를 뒤집어씌운 것도 있었습니다"라며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군인의 최고 가치는 국가가 요구할 때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라며 "생명을 바칠 기회가 없을 때는 자신에게 주어진 국방 임무를 최선을 다해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군인의 임무가 아닙니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장 전 사령관은 명예를 회복하고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과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후, 2010년에 78세로 타계하셨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2년 후에는 그의 부인이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무리
서울의 봄 이태신 역의 실존인물이었던 장태완 전 사령관의 삶은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으며 흘러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가를 위해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려 했으며, 쿠데타에 반대하는 고결한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의 삶은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진정한 군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그가 겪은 어려움과 고통은 우리의 역사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가치 있는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알스 라이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콜옵션 풋옵션 차이점은 뭘까? (0) | 2024.03.08 |
---|---|
안귀령 아나운서(앵커) 프로필 및 정치 출마 공천 (1) | 2024.03.05 |
경기도 청년복지포인트 신청 조건 및 방법 알아보기 (0) | 2024.02.29 |
영업이익 vs 당기순이익: 무슨 차이일까? (0) | 2024.02.26 |
김건모 근황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0) | 2024.02.26 |